‘제갈’, ‘선우’, ‘독고’… 복성씨의 유래와 실제 사용 현황
1. 서론: 성씨는 인류 이동의 지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성씨는 단순한 이름의 일부가 아니다. 성씨는 한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며, 동시에 한 민족이 걸어온 길을 기록하는 문화적 표식이다.

김, 이, 박처럼 흔한 성씨는 전국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지만, 반대로 전국에 10명 이하만 남아 있는 희귀 성씨들도 있다. 이 희귀 성씨들은 한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세대를 이어오며, 인구 이동의 흐름과 사회 변화를 반영하는 살아 있는 역사 자료로 평가된다. 성씨의 분포는 단순히 혈통의 증거가 아니라, 사람들의 이동 경로와 시대의 구조적 변화를 읽어내는 창이다. 이번 글에서는 2000년부터 2025년까지의 인구 통계와 함께, 희귀 성씨를 통해 본 한국 인구 이동의 흐름과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자세히 살펴본다.
2. 삼국시대~고려시대: 성씨의 시작과 초기 이동
한국에서 성씨 제도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시기는 삼국시대다. 초기에는 왕족과 귀족만 성씨를 가질 수 있었으며, 이는 신분을 구별하는 상징이었다. 고구려의 ‘고’씨, 백제의 ‘부여’씨, 신라의 ‘김’, ‘박’, ‘석’씨가 대표적이다. 이 시기에는 각 왕국의 영토 확장과 전쟁으로 인해 인구 이동이 활발했으며, 전쟁 포로나 귀화인들이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면서 성씨가 분화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고구려의 멸망 이후 유민들이 신라와 발해, 그리고 중국 동북지역으로 흩어지면서 새로운 성씨들이 생겨났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과거제가 실시되면서 학문과 공적을 세운 인물들에게 성씨가 부여되었고, 지방의 향리들도 자신만의 성씨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때 등장한 성씨들이 바로 오늘날 희귀 성씨의 뿌리가 되었다. 충청도의 탁정씨, 강원도의 향씨, 전라도의 담씨, 경상도의 견 씨 등이 그 예다.
이 시기의 인구 이동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이동이 아니라, 문화와 혈통의 교류로 이어졌다. 한반도에 유입된 중국계 복성들(남궁, 제갈, 황보, 선우 등) 역시 이 시기 귀화인들을 통해 형성되었고, 일부는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3. 조선시대: 본관 중심의 정착과 지역 이동의 제한
조선시대에 들어 성씨는 본격적으로 본관 제도와 결합했다. 본관은 한 가문이 처음 정착한 지역을 의미하며, 같은 성이라도 본관이 다르면 혈통이 다른 것으로 구분되었다. 이 제도는 조선 사회의 신분 질서와 혼인 제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조선 초기에는 중앙집권이 강화되면서 지방 향리들이 서울로 올라와 관직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지방의 문중 사회가 강화되었고, 가문이 한 지역에 고착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이로 인해 지방 토착 성씨들이 등장했는데, 바로 오늘날 희귀 성씨로 이어진 이름들이다.
예를 들어 충청남도 공주의 탁정씨는 고려 후기 문관의 후손으로, 세대를 이어 한 마을에서만 살아왔다. 강원도 양양의 향씨, 전남 구례의 담씨, 충북 음성의 김 씨 역시 오랜 세월 동안 같은 지역에 정착하며 외부 이동이 거의 없었다. 이처럼 지역 고착화는 성씨의 다양성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인구 증가의 제한으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에는 전쟁과 흉년으로 인한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일어났지만, 희귀 성씨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본관을 떠나지 않았다. 그 결과, 오늘날 이들은 “지역에 남은 마지막 가문”으로 불린다.
4. 근대화와 산업화: 이동의 폭발과 성씨의 단성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인구 이동은 역사상 가장 급격한 변화를 맞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창씨개명 정책으로 인해 많은 성씨가 사라졌고, 일부는 단성으로 변형되었다. 복성을 가진 ‘남궁’, ‘황보’, ‘제갈’, ‘선우’, ‘독고’ 등의 가문이 ‘남’, ‘황’, ‘제’, ‘선’, ‘독’으로 단순화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광복 이후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농촌 인구는 도시로 이동했고, 대가족 중심의 씨족 사회가 붕괴되었다. 한 마을의 모든 주민이 같은 성씨였던 전통적 구조가 해체되면서, 희귀 성씨들은 점차 명맥을 잃어갔다.
1960년대 이후 수도권과 대도시 중심의 인구 집중 현상은 더욱 심해졌고, 지방 소규모 가문들의 후손은 도시로 흩어졌다. 고향의 제사와 족보 전통이 약화되며, 가문 중심 문화가 개인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그 결과 2000년대 초반까지 약 500여 개의 성씨가 공식적으로 사라졌다고 통계청은 보고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시기부터 ‘희귀 성씨’라는 개념이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흔하지 않다는 점을 ‘개성의 상징’으로 인식했고, 일부는 다시 원래의 성씨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5. 현대 사회: 디지털 시대의 복원과 새로운 이동
2025년 현재 대한민국의 성씨는 약 5200개로 집계되며, 그중 2000여 개가 인구 100명 이하의 희귀 성씨다. 인구 10명 이하의 초희귀 성씨는 60여 개에 이른다. 이는 통계청과 행정안전부의 자료를 기반으로 한 결과로, 2000년대 이후 희귀 성씨의 감소 속도가 완만해졌음을 의미한다.
이 변화에는 디지털 기술의 역할이 크다. 과거 족보와 가문 기록이 종이 형태로만 존재했다면, 지금은 디지털 아카이브를 통해 누구나 자신의 성씨를 검색하고, 뿌리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성씨 아카이브’ 같은 공공 프로젝트를 통해 사라진 성씨를 복원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또한 현대 사회의 인구 이동은 과거와는 다른 형태를 보인다. 도시화로 인해 사람들은 전국 어디서든 정착할 수 있게 되었고, 국경을 넘어 해외에 정착하는 한국인들도 늘고 있다. 희귀 성씨 후손들 역시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지만, 온라인을 통해 서로의 뿌리를 확인하고 있다.
예를 들어 충남 공주의 탁정씨 후손들은 SNS를 통해 모임을 유지하며, 매년 본관 지역을 방문해 성묘를 진행한다. 전남 구례의 담씨 후손들은 지역 문화재로 등재된 족보를 복원하며 이름을 알리고 있다.
6. 희귀 성씨가 보여주는 사회의 구조적 변화
희귀 성씨는 단순히 숫자가 적은 성씨가 아니다. 그것은 지역 정체성과 사회 구조의 변화를 함께 보여주는 문화적 지표다. 인구가 적다는 것은 곧 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고착된 생활양식을 유지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이동이 적었기 때문에 혈연 중심의 공동체가 유지되었지만, 현대에는 이동이 많아지면서 이름의 다양성이 줄어들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사회가 빠르게 변화할수록 희귀 성씨의 문화적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이런 이름에서 ‘유일함’과 ‘전통’을 동시에 느끼며, 새로운 형태의 자부심을 만들어가고 있다.
7. 결론: 이름이 기록한 이동의 길
한국의 희귀 성씨는 단지 소수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인구 이동의 궤적이자, 한반도 역사 속 사람들의 삶의 증거다. 김, 이, 박 같은 대성들이 대규모 인구 이동의 결과라면, 탁정, 향, 담, 검, 효 같은 희귀 성씨는 한 지역의 정착과 고유문화를 상징한다.
이름은 움직이지만, 그 뿌리는 남는다. 오늘날 희귀 성씨를 연구하는 일은 단순한 족보 정리 작업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정체성과 다양성을 복원하는 일이다. 사라지는 이름 속에서 우리는 이동의 역사와 사람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이름이 적다는 것은 그만큼 깊다는 뜻이다. 한국의 희귀 성씨는 앞으로도 인구 이동의 역사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우리 문화를 지탱해 나갈 것이다.